중간고사 시험날 아침이었습니다. 학교 교무실로 들어가는데 몇 명의 학생이 교무실 앞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종이 쪽지를 하나 보여주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종이 쪽지에는 10개의 간결한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이것이 모 영어 선생님이 특정 반 수업시간에 중간고사를 대비하라면서 알려 준 힌트라고 했습니다. 그때서야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힌트가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교과서 몇 페이지의 지문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어떤 구문, 어떤 질문에 대한 답변 등 해당 내용을 숙지만 하면 정답을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해당 선생님은 3학년 영어수업을 담당하는 3명 중 한 명으로 한 반 수업에만 들어가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그 반 수업에서 이 힌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제게 이의를 제기한 학생들은 그 반이 아닌 학생들로 이 내용을 알게 되자 너무 구체적인 힌트로 불공정하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강력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이런 불공정한 상황에서는 영어시험을 치룰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시험시간을 불과 얼마 남기지 않고 불거진 처음 겪는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교무부장 선생님이 출근하다 이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 내용을 설명했습니다. 교무부장 선생님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교감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에게 이를 보고했습니다. 교장 선생님 주관으로 영어선생님들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다른 영어선생님들도 이 힌트는 지나치게 구체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대로 시험을 진행했다가는 시험이후 후폭풍이 심할 것이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숙지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힌트가 문제소지를 너무 많이 안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결국 영어시험은 보류가 되었고 해당 문제 대신 추가로 문제 출제를 하기로 했습니다.
이의제기와 그 후 응대는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예기치 않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해당 힌트의 주인공이었던 선생님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자신이 준 힌트는 아무런 문제는 없었는데 제가 과대포장해 문제를 크게 만들었다고 떠들어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는 영어과 이외 선생님들은 이를 믿는 눈치였습니다. 일부는 제게 와서 농담조로 왜 그랬느냐고도 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해괴한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 힌트와 학생들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그대로 진행했다면 이후의 후폭풍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저를 포함한 영어선생님들이 문제를 새롭게 출제해야 하는 비생산적인 시간과 노력을 들였지만 이후 발생될 커다란 문제를 예방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그런 비정상적인 행태가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한 소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힌트 내용을 알고 이의제기를 한 학생들의 행동이 옳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관련 선생님들이 모여 시험일자를 연기한 것도 올바른 판단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자신의 잘못을 인지하고 자숙하기는커녕 억울함을 주장하면서 다른 사람을 탓했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거죠. 정의를 가르쳐야 할 선생님이 정의롭지 않은 행동을 하고, 그 행동으로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음에도 근본적인 원인 제공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선생님이 이전 몇몇 학부모로부터 실력에 대한 항의를 받았다는 사실과 이런 힌트 주기를 연결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힌트를 구체적으로 주었는지, 또 사안이 드러난 후 왜 자신의 정당성을 억지로 주장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정상을, 정당을, 정의를 솔선수범으로 가르치는 것이 주된 역할이 아닐까요? 그런 차원에서 이번 사태는 이와는 상당한 거리로 보입니다. 교육 현장에서 이런 모습을 언제나 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