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가 은유하는 아내는 남편과 전혀 다른 사고 방식과 생활 양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는 사랑의 신인 비너스의 후손처럼 사랑을 먹고 삽니다. 아내에게서 사랑이란 교류이고 소통입니다. 아내에게는 생계를 위해 남편이 벌어오는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얼마나 정서적인 교류를 할 수 있느냐에 따라 행복을 느낍니다. 그것이 아내가 느끼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원하는 사랑의 시작은 수태에서 시작됩니다. 아이를 갖는 것은 지속적인 공감이자 교류의 과정입니다. 9개월 동안 아내는 아이의 삶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영양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 교류하고 공감하게 됩니다. 아이가 가장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면서 끊임없이 교류하는 것이죠. 사람의 모습으로 형성되는 과정에 관계없이 수태를 하는 그 순간부터 아내는 아이를 하나의 인간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제공합니다. 제공이란 제공하는 사람과 그것을 주는 행위로 구성됩니다. 아내가 존재하고 아이의 성장을 위하여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면 아이는 아내에게 희열을 제공합니다. 이것이 아내와 뱃속 아이와의 교류이고 공감입니다.
아내는 이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과정을 통해 숙명적으로 사랑이란 정서적인 공감이고 교류라는 것을 배우게 되고 이 사랑에 천착하게 됩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여자라는 이유로 알게 된 것이죠. 따라서 사랑이라고 하면, 행복이라고 하면 정서적인 교류와 공감이라고 동일시합니다. 따라서 사랑을 하는 남편에게도 동일한 시각을 갖고 사랑을 측정합니다. 연애할 때 남편은 아내의 이런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늘 교류하고 공감하고, 그 표현으로 나를 쓰다듬어 주고 껴앉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런 시간들은 희박해졌습니다. 공감이나 교류를 해야 할 정서가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지 않다고 느끼게 됩니다. 남편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달라졌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이 변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내 얘기만 들어주고 그것에 공감만 해줘도 아내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데 아내의 그런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결론이 뭐냐”, “왜 바쁜 사람 붙잡고 쓸데없는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느냐”라고 묵살합니다. 결론을 도출하고 싶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남편을 결론을 가정하고 얘기합니다. 아내가 가진 고민을 공감하지도 교류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아내는 정서적인 교류를 할 친구를 찾습니다.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모여 얘기를 합니다. 친구들과 만나면 사랑 받는다고 느낍니다. 공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맞아!’ ‘그래서?’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는데’, ‘어쩜’, ‘놀랍다’, ‘대단하다’, ‘나도 그래’, ‘세상에’… 등등. 친구들의 공감 표시는 아내로 하여금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남편과의 대화단절에서 오는 고민을 상쇄시킵니다.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게 되는 것이죠.
이렇듯 아내는 정서적인 교류나 공감을 원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이러한 역할을 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아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가지가 전부입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는 현재의 생활을 참고 안주하거나, 다른 대체재를 찾아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끊임없는 잔소리로 바가지를 긁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도 가장 사랑받아야 할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니 스트레스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근본 원인에 대한 치유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