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감독을 했습니다. 오래 전이긴 하지만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어 수험생이 갖는 긴장과 걱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시험감독을 할 때 가급적이면 그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수험생은 시험이 주는 중압감으로 매우 민감한 긴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불편도 시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접촉과 공식적인 언급만으로 감독관이 반드시 해야 할 책임만을 수행하려 노력합니다.
감독관에게는 몇 가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중에 우선적인 것은 모든 규율을 수험생에게 공정하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험생에게는 느슨하게 적용하고, 어떤 수험생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험생에 대한 이러한 공정한 적용 전에 더 큰 하나의 전제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시험과 관련한 규율이나 기준은 사전에 정해진 것을 철저히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규율과 기준을 감독관이 자의적으로 판단하여 실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많은 다른 현장과의 형평성 문제가 발생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험생 개인들간의 공정성 이전에 규율과 기준에 대한 공정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수능시험의 감독관에게 부여된 이러한 두 가지 중요한 책임은 반드시 준수되어야 하고 다만 그 준수의 과정에서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수험생의 상황을 존중하는 것이 감독관이 해야 할 역할이자 의무인 것입니다.
다른 시험도 그렇지만 수능시험시간은 모든 수험생에게 부족할 것입니다. 다른 시험보다 인생에서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만큼 시간은 더 부족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시험에서 쉽게 답을 찾지 못하면 조급성은 더 커지고 그 조급성이 심리적인 시간의 부족을 채촉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험생의 시험준비 연습은 항상 시간관리가 중요한 요소로 포함됩니다. 문제의 답을 모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일 수 있으나 시간관리를 잘못하여 문제의 정오 차원에 이르지 못할 때에는 온전히 수험생 개인이 행한 실수로 귀결됩니다. 이런 경우 시험 이후 커다란 자괴심을 느끼게 되고 그 만큼 후유증도 깊고 오래 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감독관은 앞서 말한대로 시간에 관한 한 개인의 상황을 감안할 수가 없습니다.
수능시험의 마지막 과목에서 한 수험생이 시험 종료 벨이 울렸음에도 계속 답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매몰차게 곧바로 시험지를 낚아챌 수는 없습니다. 수험생의 상황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독관이 준수해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경고를 줍니다. 펜을 놓게 하고 몇까지 셀 때까지 계속해서 답을 쓰면 무효처리를 하겠다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숫자를 셉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수험생들은 규율에 따라 펜을 놓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해당 수험생은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수험생에게 다가가 마지막 경고를 한다고 하고 지금 펜을 놓지 않으면 무효처리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답을 다 쓰지 못했다고 시간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해당 수험생의 사정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감독관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험지를 수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수험생이 종료 후에도 계속 따라오면서 답안지를 쓰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감독관 때문에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서…
수능시험이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시험에서 답안지를 제대로 다 작성하지 못하면 아쉬움이 심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하지만 시간관리의 책임은 수험생 본인에게 있는 것이고, 감독관은 준수해야 할 본분을 다 지켰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감독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수험생이 해야 할 준비의 미숙을 탓하기 전에, 갖춰야 할 예절을 탓하기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러한 태도로 좋은 대학을 가면 뭐하나라는 생각 말이죠.
하나의 단편적인 상황으로 그 수험생의 태도를 운운하기는 어렵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율은 준수하고, 안타까움과 책임에 대한 귀속은 분명히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수능시험생 정도면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성년의 초입에 있는 나이입니다. 잘못의 원인에 대한 판단을 충분히 하고 남을 나이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만 규율의 특혜를 원합니다. 비록 큰 것은 아닐지라도 세상은 이러한 작은 것들에 대한 준수가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 기반 됩니다. 만약 그가 시간을 더 할애받아 그로 인해 좋은 대학을 가게 되었다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그리고 그런 친구가 좋은 대학을 나와 사회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는 어떤 세상을 만들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