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소리없이 가고 새로운 한해가 다가옵니다. 매년 한 해의 초입(初入)에선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도 많았는데 막상 이맘때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한해를 보낼 때면 적지 않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아쉬움만을 오래 안고 있을 수 없습니다. 간단(間斷)없이 다가오는 새로운 한해가 이미 문앞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아쉬움에 집착하다 보면 스스로에 대한 무력감에 젖을 수 있고, 그 무력감의 얹저리에서 맴돌다 보면 절망의 심연(深淵)으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것들의 몰락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죽음 만큼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도 없지만 실제 죽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랑을 막을 수도 없고, 신념을 바꿀 수도 없고, 믿음을 억누를 수도 없고, 평화를 깨뜨릴 수도 없고, 자신감을 파괴할 수도 없고, 소망을 버리게 할 수도 없고, 우정을 변하게 할 수도 없고, 추억을 막을 수도 없고, 진실을 죽일 수도 없고, 용기를 삼킬 수도 없고, 영혼을 망가뜨릴 수도 없습니다. 죽음도 어찌하지 못하는 사랑을, 신념을, 믿음을, 평화를, 자신감을, 소망을, 우정을, 추억을, 진실을, 용기를, 영혼을… 죽이는 것은 절망입니다. 존재로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모든 것을 마감시키는 절망 - 그 단애(斷崖)로 떨어질 지 모르는 어떠한 빌미도 제공하고 싶지 않습니다. 가는 한해에 갖는 아쉬움에서 빨리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는 한해가 드리운 아쉬움의 잔상(殘像) 위로 ‘희망’을 살그머니 덮어 씌워봅니다.
인간에게 ‘희망’을 선물한 것은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인간을 위해 하늘에서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와 그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의 외람된 짓을 벌하고, 인간들에겐 불이란 선물을 받은 죄를 벌하기 위해 제우스가 최초의 여자, 판도라와 함께 갖가지의 좋지 않은 것들을 상자에 담아 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상자에 ‘희망’을 넣어준 신이 ‘프로메테우스’입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인간을 괴롭히는 무수히 많은 재액들이 달아났습니다. 판도라는 놀라 상자 뚜껑을 재빨리 닫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다 날아가고 오직 하나 만이 상자 맨 밑에 남았습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어떤 재난에 처할 때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떠한 것도 우리를 절망 속으로 침잠(沈潛)케 하지 못하게 하는 ‘희망’ - 그 ‘희망’을 지금 가져 봅니다.
또 다시 오는 한해도 역시 불확실함을 동반합니다. 그 한해 속엔 어떤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희망도 바로 그 불확실함 혹은 미지(未知)와 함께 옵니다. 하지만 희망을 가진다면 절망에서 벗어날 것이란 확실함은 알게 됩니다. 희망이 어디로 우리를 인도할 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절망의 나락(奈落)으로 추락하지 않을 것임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의 기대이자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아쉬운 오늘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의지와 내일이 오늘보다 더 살만한 시간과 공간이라는 기대가 있을 때 희망이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한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면서 희망을 얘기하는 것도 바로 우리의 기대와 의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다가오는 불확실한 미래에도, 그 미래가 오늘보다 나아질 거라는 기대와 그 기대를 현실화 시키려는 의지가 있을 때, 즉 희망이 있을 때 새로운 한해는 밝아 보입니다.
